
독일 고급 와인 산지라 하면 우리는 흔히 모젤(Mosel)이나 라인가우(Rheingau)의 아찔한 경사지를 먼저 떠올린다.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라인헤센(Rheinhessen)은 상대적으로 소박한 인상을 남기는 편. 그러나 라인강(Rhein River)과 나헤강(Nahe River)이 만나는 한 모퉁이, 빙엔(Bingen)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라인헤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콰르지트(Quarzit) 토양 위에서 오래도록 고품질 와인이 빚어진 곳이다. 지난 5월, 빙엔을 대표하는 와이너리 리펠(Riffel)의 디너가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에서 열렸다. 오너 부부 중 캐롤린 리펠(Carolin Riffel)의 방한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리펠은 빙엔에 뿌리내린 4세대 가족 경영 와이너리이다. 와인메이커는 에릭 리펠(Erik Riffel), 캐롤린의 남편이다. 부부의 포도밭이 있는 빙엔은 오렌지 혹은 노란빛을 띠는 ‘콰르지트’라 불리는 규암으로 인해 나머지 라인헤센 지역과 구분된다. 본래 라인가우에서 주로 발견되는 콰르지트 돌이 아주 오래전 이 일대를 휘감아 흐른 라인강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낮 동안 머금은 열을 밤에 천천히 내어놓는 콰르지트는 빙엔 지역의 포도가 충분히 익으면서도 산도와 단단한 구조를 지니게 한다. 배수가 좋아 풍미를 응축시키는 것도 주요한 이점. 리펠의 와인을 ‘선형적이고 미네랄이 많은 와인’이라 표현할 때 그 출발점에는 늘 콰르지트가 있다. 빙엔을 둘러싼 라인강과 나헤강이 만나는 지형은 포도에 또 다른 선물을 준다. 비밀은 공기의 흐름. 두 강을 타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바람이 습기를 흩어 포도를 건강하게 성숙시킨다.

리펠의 로고에는 독특한 문양이 있다. 전통성을 보여주는 와이너리 건물인 오래된 탑과 '달 월(月)'을 동시에 표현한 문양이다. 와인 애호가라면 짐작할 수 있듯, '달 월(月)'은 바이오다이나믹(biodynamic) 농법을 상징한다. 라인헤센에서도 특별한 입지의 포도밭을 최상의 상태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리펠은 2009년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이어서 바이오다이나믹(biodynamic)을 도입한 건 2012년. 캐롤린에 의하면 “와인의 품질 자체를 한층 끌어올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한다. 제초제와 살충제 대신 말 분뇨와 60종이 넘는 허브가 포함된 녹비(綠肥) 식물을 활용하는 재생 농법까지 실천한 결과, 토양의 생명력이 회복되며 자연스레 포도의 자생력도 높아졌다. 포도밭에서 새 둥지가 발견될 정도로 생물다양성이 높아진 건 두말할 필요 없다. 지속가능성을 향한 리펠의 의지는 와이너리 운영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데, 에너지 생산을 위한 자체 태양광 설비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레 인적 자원의 지속가능성까지 연결된다. 직원들에 대해 오너로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캐롤린의 태도는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일은 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직원들이 신나는 하루를 보내길 바란다. 직원들이 일하러 오는 것을 사랑하고 일과 삶의 균형이 잘 잡힐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려 한다.”

네 개의 그랑 크뤼
빙엔 암 라인(Bingen am Rhien)이라는 풀네임을 지닌 이 지역에서 리펠은 네 곳의 그랑 크뤼 포도밭을 소유한다. 같은 지역 안에 있으면서도 강을 바라보는 방향과 토양, 경사와 바람이 저마다 달라 네 밭은 서로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가장 서쪽에 자리한 샤를라흐베르크(Scharlachberg)는 리펠의 플래그쉽 포도밭이다. 리펠의 네 포도밭 가운데 콰르지트가 가장 뚜렷하게 발견되고, 점판암까지 섞여 전반적으로 돌이 많은 토양을 지닌다. 전체 27헥타르 중 리펠이 소유한 땅은 5헥타르. 100~200미터의 고도와 나헤강을 바라보는 남향의 입지, 가파른 경사가 더해져 자연히 완숙도와 에너지가 높은 포도가 생산된다. 드라이한 스타일부터 스위트한 스타일까지 커버 가능한 농밀하고 무르익은 리슬링 포도뿐 아니라, 적포도인 피노 누아도 이곳에서 재배된다.

키르슈베르크(Kirchberg)는 리펠의 그랑 크뤼 중 샤를라흐베르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라인강을 바라보는 동향의 입지는 한낮의 강한 열기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강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밭을 통과하며 습기와 열을 다스려준다. 덕분에 샤를라흐베르크보다 서늘한 편. 결과적으로 키르슈베르크에서는 더 산뜻하고 긴장감 있는 스타일의 리슬링이 생산되는데, 허브 향과 시트러스의 신선함, 섬세한 과실향에 더해 복합적인 플린티(flinty) 미네랄리티를 보여준다. 전체 9헥타르 중 리펠이 가진 몫은 1헥타르, 고도는 110~140미터이다.

서쪽의 샤를라흐베르크와 동쪽의 키르슈베르크의 사이에는 특별한 두 그랑 크뤼가 있다. 우선 빙엔 전체로 봤을 때 한가운데에 있는 오스테르베르크(Osterberg). 리펠의 그랑 크뤼 중 질감과 바디감이 가장 돋보이는 포도밭이다. 강 자갈이 섞인 점토질 이회토이며 남향인 점이 풍부한 바디감에 기여한다. 오래된 모젤 클론의 리슬링이 심겨 있는 점도 특별하다.
오스테르베르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로젠가르텐(Rosengarten)에서는 네 그랑 크뤼 중 향이 가장 아로마틱하고 매혹적인 와인이 나온다. 포도나무 열(row)이 시작되는 자리에 장미가 심겨 있는데 신기하게도 와인에서 정말 장미 향이 피어난다고. 강자갈이 섞인 점토질 이회토와 남향의 입지는 오스테르베르크와 비슷하지만 ‘장미가 핀 강바닥(A River Bed of Roses)’이라 부를 정도로 향기로운 향으로 개성을 지닌다.
잔에 담긴 빙엔
이번 디너에서는 젝트부터 리슬링, 샤르도네, 피노 누아까지 여섯 종의 와인으로 리펠이라는 와이너리의 폭을 보여주었다. 손수확, 부드러운 압착, 자연 발효가 중심이 된 절제된 개입으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와인들이었다.

리펠 리슬링 젝트 브륏(Riffel Riesling Sekt Brut) NV
4주에 걸친 수확 기간 중, 산도가 가장 좋고 당도가 너무 높지 않은 첫 주에 수확한 리슬링을 사용했다. 전통 방식(병내 2차 발효)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며, 알코올은 12%를 넘지 않게 최대한 유지하면서 양조했다. 송이째 부드럽게 압착한 포도즙을 발효했고, 최소 36개월간 리(lees) 숙성을 거쳤다.
과일과 꽃, 허브 등 신선하고 진한 리슬링 아로마와 긴 숙성에서 비롯된 고소한 브리오슈, 효모 향의 밸런스가 아주 좋다. 복합적인 풍미와 섬세한 기포, 생동감 있는 산도가 입안을 경쾌하게 채우며, 부드럽고 크리미한 질감으로 마무리된다. 비노스(Vinous) 93점.

리펠 리슬링 트로켄(Riffel Riesling Trocken) 2023
빙엔 지역 전반에서 자란 포도로 양조한 드라이 리슬링이다. 2023년은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더없이 적절한 시기에 수확할 수 있었던 빈티지라고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를 중심으로 양조했으며 리 숙성을 거쳤다.
복숭아와 살구 같은 잘 익은 과일 아로마가 돋보이는, 편안하게 즐기기 좋은 와인이다. 깔끔한 산도와 함께 약간의 미네랄 터치가 느껴지고, 경쾌하면서도 정제된 구조감을 보여준다. 리펠의 스타일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주는 에스테이트 리슬링.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 93점, 비노스 90점을 받았다.

리펠 빙어 리슬링 콰르지트 트로켄(Riffel Binger Riesling QUARZIT Trocken) 2022
가장 서쪽의 샤를라흐베르크와 가장 동쪽의 키르슈베르크, 두 포도밭에서 자란 리슬링으로 콰르지트 토양 그 자체를 표현했다. 손수확한 포도를 약 6시간 동안 침용시킨 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독일산 대형 오크 캐스크에 나눠 발효하고, 리 숙성 기간을 길게 가졌다.
보다 뚜렷한 테루아 표현이 돋보이는 와인. 핵과류와 시트러스의 아로마와 선명한 미네랄감이 인상적이다. 오크 캐스크에서 오는 옅은 타닌감과 함께 질감이 한층 또렷하게 잡히고, 집중도 있는 구조와 좋은 산도가 균형을 이룬다. 캐롤린에 의하면 “5~10년 이상 숙성도 가능한 스타일”이라고. 제임스 서클링 94점, 비노스 91점을 기록한 이 와인은 이날 디너를 위해 소피텔에서 특별히 준비한 독일식 소시지와 함께 페어링되어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리펠 빙어 샤를라흐베르크 리슬링 트로켄 그로스 라게(Riffel Binger Scharlachberg Riesling Trocken Grosse Lage) 2023
리펠의 플래그쉽 리슬링으로 많은 상을 받아온 와인이다. 샤를라베르크에서도 최고의 구획에서 거둔 포도를 압착한 뒤, 안쪽을 토스팅하지 않은 1,200리터 사이즈의 독일 전통 오크 캐스크에서 발효했다. 이후 유산 전환 없이 1년간 리 숙성 후 병입.
따뜻하고 햇살이 풍부한 샤를라흐베르크의 성격을 고스란히 비추는 우아한 리슬링이다. 잘 익은 핵과류를 중심으로 꽃과 은은한 야생 허브의 뉘앙스, 미네랄 터치가 섬세하게 어우러진다. 입안에서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질감으로 시작해 길고 안정적인 여운으로 이어진다. 제임스 서클링이 해마다 98~99점을 매기는 와인으로, ‘JS 독일 100대 와인(Top 100 Wines of Germany)’에서 98점으로 45위에 오른 바 있다.

리펠 샤르도네 리저브 트로켄(Riffel Chardonnay Reserve Trocken) 2020
라인헤센에서 드물게 생산된 샤르도네 와인이다. 리펠 부부는 해마다 부르고뉴의 오크통 제작소를 직접 찾아가 나무와 토스팅 레벨을 고르고 오크통을 맞춤 제작하여 들여올 정도로 이 와인에 공을 들인다. 빙엔 지역에서 자란 샤르도네로 만든 프렌치 스타일의 풀바디 와인으로, 향의 집중도와 균형을 위해 약 12시간 스킨 컨택을 거친 뒤 프렌치 바리크에서 발효했다. 이후 12개월간 효모와 함께 숙성하며 정기적인 바토나주(bâtonnage)로 질감과 깊이를 더했다.
브리오슈와 견과류의 고급스러운 향과 시트러스, 복숭아, 멜론, 사과의 풍성한 과일 아로마가 조화를 이룬다. 오크 숙성에서 온 바닐라와 캐러멜, 은근한 스모키 노트가 더해져 단단한 구조감을 부여하고, 생동감 있는 에너지와 함께 긴 여운이 이어진다. 제임스 서클링 93점.

리펠 빙엔 피노 누아 마리아주 트로켄(Riffel Bingen Pinot Noir Mariage Trocken) 2022
2003년 오너 부부가 결혼하며 기념으로 만들었던 와인이다. 원래는 결혼 기념 빈티지로 2003년에 한 번만 만들 생각이었으나, 이 와인을 너무나 아낀 한 고객에 의해 2005년부터 꾸준히 만들어 오고 있다. ‘결혼’을 뜻하는 마리아주(Mariage)라는 와인명도 그 탄생 스토리에서 왔다. 오래된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하여 과실의 순수함을 지키면서도 절제된 오크 터치가 질감과 구조감을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밝은 체리와 라즈베리, 레드 커런트 계열의 붉은 과실 향이 중심을 이루고, 은은한 허브와 흙 내음, 섬세한 스파이스 뉘앙스가 뒤따른다. 입안에서는 선명한 산도와 부드러운 타닌이 균형을 이루며, 규암에서 비롯된 미네랄 터치가 긴장감을 더한다. 디캔터(Decanter) 95점을 받았다.
달이 머문 자리
캐롤린 리펠의 방한을 기념한 이번 디너는 국내에 막 정착하기 시작한 리펠의 와인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콰르지트 규암이 머금은 온기와 두 강이 실어 나르는 바람, 그리고 달의 주기에 맞춰 와인을 만드는 손길. 레이블에 새겨진 달(月) 한 글자가 품은 이야기는 빙엔 지역의 테루아와 다음 세대를 향한 부부의 마음과 함께 잔 속에서 선명하게 전해졌다.

수입사 KS와인
글·행사 사진 신윤정 와인 및 와이너리 사진·자료 제공 KS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