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업장 두 곳을 방문했던 날, 누군가 질문했다. ‘사람들이 와인을 일상적으로 즐긴다면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답을 더듬을 때 눈에 든 주변 풍경. 중년 남성이 부라타 치즈 한 접시에 50ml 레드 와인 한 잔을 받아온다. 한 손엔 읽다 만 신문이 접혀있고 혼자였다. 옆 테이블에는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와인 여섯 잔을 줄 세워 시음하는 여자가 마주앉아 있었다. 같은 날 20분 거리의 또 다른 업장에서는 사람들이 블라인드로 와인을 시음하며 와인에 어울리는 그림 카드를 찾고 있었다. 먼저 언급했던 곳은 잠실의 부라타랩, 후자는 청담의 와인소셜이다. ‘와인을 소비하는 모습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다’고 이곳에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서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이 가벼움에 힌트가 있을지도.
와인 시음하고 갈래요? 부라타랩에서
잠실 롯데마트 안 보틀벙커, 그 안에 부라타랩이 있다. 와인애호가들의 성지로 소문난 보틀벙커의 입구를 통과해 부라타랩으로 향한다. 먼저 마주치는 건 와인 테이스팅 탭 세션이다. 각 잡고 서있는 와인 디스펜서(일종의 와인 자판기)에 선택을 기다리는 80여 종의 와인을 보라.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용방식은 먼저 카드를 충전한다(충전은 만원부터 가능하다). 시음하고 싶은 와인을 고른 다음 충전한 카드를 태그하고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탭에서 쪼로록 와인이 나온다. 와인은 한 잔(30ml 또는 50ml)에 천원부터 75,000원 까지 하는 그랑 크뤼 와인까지, 요즘 핫한 내추럴 와인부터 한국 와인까지 다양하다. 한편에는 부라타 치즈를 생산하는 랩이 있다. 투명한 창으로 둘러싸여 치즈를 만드는 과정이 훤히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은 현장에서 만든 생 부라타 치즈에 다양한 와인을 낱잔으로 시음할 수 있는 곳이다.
부라타 치즈와 낱잔의 와인
부라타랩의 나기정 대표는 와인주막 차차 때부터 와인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와인과 한식 매칭, 와인 취향 사다리 타기, 와인 한 잔에 간편식 등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가 시도했던 방식들이다. 그간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내어놓은 새로운 답안지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잔술과 즉석에서 만든 생치즈’. 바로 지난해 12월 오픈한 부라타랩이다. 와인을 병 단위가 아닌 낱잔으로 다양하게 즐기는 것은 소비자에게는 매력적인 일이지만 업장 입장에서는 재고 관리의 어려움이 크다. 이전에 잔술 판매의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번에는 디스펜서를 선택했다. 곁들일 음식은 간단한 것이라도 좀 더 전문성을 높이고 싶었다고 한다. 와인전문가인 그녀는 이번엔 치즈에 빠져들어 몇 달간 밤잠을 놓쳤다.
치즈 중에서도 부라타 치즈를 선택한 이유는 숙성 치즈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 대표는 “숙성치즈는 수입산이 훨씬 맛있고 가격도 싸다”며 “하지만 생치즈는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모짜렐라 치즈와 부라타 치즈 모두 성공했지만 부라타 치즈부터 시작한 이유는 부라타가 햄, 샐러드 과일 다른 숙성치즈 등과 조합이 더 좋아서라고. 치즈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우유는 천안에 있는 목장에서 공급받는다. 짠지 72시간 내 우유만이다. 그간 성공적인 부라타 치즈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우유를 쏟아 부었다. 대표적인 메뉴는 바질 페스토를 곁들인 부라타 치즈, 블루베리 처트니를 곁들인 부라타 치즈 등. 와인과는 궁합이 좋은 메뉴들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와인대중화 못지않게 K-푸드의 세계화를 주장해 온 그녀답게 떡볶이를 끌고 왔다. 떡볶이에 부라타 치즈 한 덩이 크게 올리는 조합. 맛있는 거 더하기 맛있는 건 더 맛있는 법이니까. 부라타랩은 이름대로 부라타 치즈가 좀 더 주연 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와인은 거들뿐’이라고 하기엔 테이스팅 탭 라인업이 많이 진지하다. 80여 종의 와인은 주기적으로 바뀐다. 마트에 와인 사러 왔다가도 하염없니 놀기 좋은 곳인데 손님들의 면면은 그 이상으로 다채롭다. 같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한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상대는 대여섯 가지 와인을 비교 시음한다. 낮 시간에 회의를 하면서 샌드위치에 와인 한 잔 하는 사람도 있고, 저녁에 혼술 겸 혼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마니아들은 30ml에 7만 5천원 하는 그랑크뤼 와인을 집중 공략하고, 어떤 애호가들은 경북 영천에서 만든 화이트 와인 앞에 발걸음을 멈춘다.
와인소셜, 정답은 없어요
같은 날 청담에 위치한 와인소셜을 찾았다. 입구가 좀 모호해서 여기인가 싶은 곳을 조심스레 열었더니 맞았다. 막상 열고 보면 명백한 문이지만 와인 세계의 입구다운 내밀함이 있다. 어쩌면 그 자체로 메시지 같다. 와인을 블라인드로 시음하는(와인을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이 곳은 ‘열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지난해 12월 오픈한 와인소셜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와인 테이스팅 룸이다. 방문했던 7월 중순에는 코스A(45,000원), 코스B(45,000원), 섬머코스(50,000원), 도산코스(80,000원) 4가지 테이스팅 코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코스별로 5개의 와인과 간단한 푸드 플라이트가 제공되고, 2시간 동안 이용 가능하다.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프라이빗 룸 공간도 있다. 이용료는 별도) 테이스팅 코스를 선택하면 마주한 소믈리에가 레이블을 꽁꽁 싸맨 와인들을 가져와 5개의 잔을 채운다. 곧 그림이 있는 다섯 장의 카드도 받는다. 와인을 시음하고 자신이 와인에서 느낀 이미지와 유사한 그림 카드를 매칭하는 것이다. “답이 있나요?” 본능적으로 튀어나간 질문에 소믈리에가 답했다. “정답은 없어요.” 그렇다. 와인에 정답이 있을 리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선택한 이유
와인소셜은 캘리포니아 소노마 출신으로 와인 수입사 보틀샤크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김(David Kim) 대표가 만든 곳이다. 총괄을 맡고 있는 조성곤 매니저도 함께 구상했다. 와인 채널 유튜브 운영자이기도 한 조성곤 매니저는 “맛있게 마시면 됐지. 와인에 대한 지식이나 에티켓이 뭐 그리 중한가”라고 늘 생각했다. 유튜브 채널를 통해서도 늘 전하는 메시지였으나 온라인에서는 한계를 느꼈다. 데이비드 김 대표 역시 한국에서 와인을 유통하면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와인을 좀 더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두 사람은 공감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와인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컨셉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화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와인소셜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와인소셜의 비즈니스 철학을 잘 대변한다. 조성곤 매니저가 말했다. “와인을 수입하는 입장에서 보면 와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솔직한 반응을 알기가 쉽지 않다. 와인을 유통하는 과정에서도 와인을 맛으로만 평가하기가 힘들다. 와인 브랜드, 레이블, 스토리, 평론가의 점수 등이 와인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처음부터 선택지에 들지 못하는 와인들도 무수하다. 그래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라는 방식을 원했다.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맛으로만 와인을 평가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작은 수입사의 알려지지 않은 와인도 맛만 있다면 충분히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고, 와인에 대한 소비자의 솔직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조성곤 매니저는 시음 와인을 고를 때 소규모 와인수입사의 와인을 다양하게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와인이 있는 레크레이션
와인 레이블의 정보는 가이드라인이 되기도 편견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정보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성곤 매니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은 A와인이 더 맛있는데 B와인이 더 유명하거나 비싼 와인이라고 하면 어떤가. 와인비기너의 입장에서는 와인을 잘 모른다는 생각에 움츠러든다. 자신의 느낌과 관계없이 좋은 와인이라 하면 수긍해야 할 것 같은 불편함을 없애고 싶었다. 모르더라도 즐길 수 있는 게 와인이고, 와인으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게 와인소셜이다.” 와인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아카데믹한 공간이 아니라 와인을 통해서 경험과 감각을 늘리는 곳. 와인이 있는 레크레이션을 생각했고 그래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그림 카드를 제공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시행착오는 있었다. 초기에는 작가들과 협업하여 그림 카드를 제작했다. 헌데 작가들의 이미지는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손님들이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찾아 카드로 제작했다. 카드를 제작하는 과정에도 조성곤 매니저 포함 여섯 명의 소믈리에들이 머리를 맞댄다. 시음이 끝날 무렵에는 소믈리에가 와인을 오픈하고 와인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데, 와인 레이블을 오픈하기 전에 보면 와인과 매칭한 그림카드가 저마다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고 한다. 와인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그림에 대한 해석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발레리나의 점프 동작에서 우아함을, 어떤 이는 강렬함을 읽었다. 시선의 차이가 대화로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이런 대화를 굉장히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피로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와인 마시면서 이런 것 까지 해야 해? 라는 반응. 재미있는 점은 그런 불편함을 내색하는 손님에는 남성들이 많았다는 것. 그래서인지 손님은 20~30대 여성층의 비율이 높다.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게임처럼 즐기는 애호가들은 혼자 와서 진지하게 시음에 몰두하기도 한다. 이용자의 비율을 보면 비기너층과 마니아층이 7: 3 정도다.
조성곤 매니저는 “처음에 걱정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굉장히 빠르게 이 컨셉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오픈하고 4개월은 너무 예약이 몰려서 한동안 예약 안 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고. 와인소셜의 컨셉만큼 신경 썼던 것은 시음하는 와인의 퀄리티와 구성, 그리고 가격이다. 재미있게 데이트할 수 있는 장소로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가격을 제시하고 싶었다. 기본 코스 5개 와인에 45,000원. 한 잔 당 9천원 꼴인데 시음 와인의 퀄리티와 구성이 꽤 괜찮다. 테이스팅 코스는 주기적으로 바뀐다. 새롭게 부르고뉴 와인 코스도 구상 중이고, 최고급 와인을 원하는 손님 층의 니즈를 반영해 VIP 코스도 고려하고 있다.
글·사진 강은영 사진 제공 부라타랩, 와인소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