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련한 바텐더도 긴장하게 만드는 칵테일이 있다. 포토 플립(Porto Flip), 국제 바텐더 협회(IBA) 공식 등록 칵테일이자 ‘칵테일의 아버지’ 제리 토마스(Jerry Thomas)가 1862년 세계 최초의 칵테일 북 에 남긴 바 있다.
얼핏 보면 특별한 것도 없다. 루비 포트, 브랜디, 계란 노른자, 설탕이나 시럽. 그런데 계란 노른자가 문제다. 보통 칵테일보다 2~3배 더 오래, 더 세게 흔들어야 비로소 벨벳 같은 질감이 살아나기 때문. '마시는 디저트'라는 별명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지난 4월 27일(월), 서울에서 그 계보를 잇는 칵테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로 그라함 블렌드 시리즈 칵테일 대회 한국 예선. 15명의 바텐더가 포토 플립 이후 160년을 건너뛰어, 저마다 전혀 다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포트 와인이 칵테일 쉐이커 안으로 들어간 이유
대회를 주최한 그라함(W. J. Graham's)은 1820년에 설립된 포트 와인 하우스다. 1970년부터 시밍턴(Symington) 가문이 경영하며 도우로(Douro) 밸리에 23개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영국 왕실 행사의 공식 포트 와인이며 각종 주류 매체에서 손꼽히는 포트 브랜드 중 하나다.
포트 와인은 꽤 오랫동안 '정찬을 마무리하는 디저트용 와인' 혹은 '크리스마스에나 마시는 술'이란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 그라함은 그 이미지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열쇠는 칵테일. 이미 19세기의 포토 플립이 증명했듯, 포트와인 특유의 풍부한 과실향과 달콤한 맛, 적당한 도수는 칵테일 베이스로서 손색없다.

그라함은 화이트 포트(블렌드 넘버 5)와 루비 포트(블렌드 넘버 12)로 구성한 ‘블렌드 시리즈’를 카드로 꺼내들었다. 처음부터 두 와인은 칵테일 믹싱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었다. 도수는 19%로 기존 리큐르보다 낮다. 오늘날 주류 트렌드인 가볍게 마실 수 있다는 것, 블렌드 시리즈는 그 흐름을 정확히 읽었다. 칵테일 재료로 즐겨 이용하는 과일들이 그려진 화사한 레이블만 봐도 ‘포트 & 토닉’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열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그라함 블렌드 시리즈 칵테일 대회는 전 세계 바텐더들이 블렌드 시리즈로 직접 칵테일을 만들며, 포트 와인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자리로 시작됐다. 올해로 대회는 5회차를 맞았고 한국 예선은 2025년에 이어 두 번째다. 2025년 대회에서 한국 대표 안승현 바텐더가 세계 3위에 올랐다. 지구 반대편 포르투갈에서 한국 이름이 울려 퍼졌다는 사실은 올해 15명의 참가자들에게 적잖은 자극이 됐을 것이다.
한 잔 안에 담아야 할 것들
참가자들은 사전에 블렌드 넘버 5 또는 넘버 12를 활용한 오리지널 칵테일 레시피를 제출하고 예선 당일 심사위원 앞에서 10분 안에 직접 구현해야 한다. 다음 일곱 가지 항목에 따라 평가한다. 칵테일의 이름과 영감·스토리부터 그라함과 도우로에 대한 지식, 재현 가능성, 비주얼, 아로마 그리고 맛까지. 단순히 맛있는 칵테일이 아니다. 재료 뒤에 이야기가 있고 브랜드를 이해하고 언제든 바에서 반복 재현이 가능해야 한다.

그라함의 아시아 태평양 매니저 조르지 누네스(Jorge Nunes)는 심사 전 미리 레시피를 검토한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만의 매력을 구현한 작품들이 많아 기대하고 있다.” 과장이 아니었다. 매실 엑기스, 고추장아찌의 간장, 조청, 된장 리큐르, 들기름, 감식초, 누룽지, 유자 등. 포트 와인과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한국의 식재료들을 맞닥뜨렸고 그 충돌은 놀랍도록 자연스러웠다.
세 개의 칵테일, 세 개의 이야기

'Twelve Moons' by 임대웅 바텐더(바 숙희) / 그라함 블렌드 시리즈 칵테일 대회 1등
된장은 기다림의 산물이다. 넘버 12도 마찬가지다. 자정에 수확한다는 서사와 발효의 정성이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데서 'Twelve Moons'가 출발한다. 된장 베이스의 리큐르와 넘버 12는 하나가 되어 은은한 된장 향에서 고소한 우마미로 이어졌다. 된장 크럼블과 두부 치즈 가니시도 심사위원들의 미각을 자극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심사평은 이 칵테일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글로벌 파이널 심사위원들도 맛보길 원한다는 말도 뒤따랐다. 임대웅 바텐더는 “익숙함 속의 새로움을 구현하고자 했던 노력이 인정받아 영광”이라 전했다.

'Twin Heritage' by 김용훈 바텐더(바 코블러) / 그라함 블렌드 시리즈 칵테일 대회 2등
매실을 표현한 포크 받침대, 거친 질감의 코스터, 복숭아 양갱. 김용훈 바텐더의 'Twin Heritage'는 잔을 들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국의 과하주와 포트 와인은 수백 년의 시간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주정강화라는 같은 답에 도달했다. 그 평행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한 잔에 담았다. 넘버 5와 과하주, 둘을 이어주는 레몬 & 복숭아 비터가 청량함까지 살렸다. 심사평은 "한국과 포르투갈 주정강화의 만남"으로 덧붙일 말이 없다. "와인을 베이스로 하는 대회까지 나오는 걸 보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나라에서 포트 와인이 칵테일 베이스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엿보았다.

'Amora' by 오현정 바텐더(매거진노츠) / 그라함 블렌드 시리즈 칵테일 대회 3등
"오미자를 한입에 문 듯, 봄의 따뜻함과 쌉싸래함이 공존한다." 학창시절에 즐겨 마셨다는 크림소다에서 출발한 오현정 바텐더의 'Amora'는 서정적이다. 카시스, 석류, 레몬 버베나로 넘버 12의 밝은 산미와 풍미를 끌어올리고 크림이 첫 느낌을 부드럽게 감싼다. 각 재료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도 조화로웠다. "한국적인 요소를 더해 재해석해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는 그의 소감에서 설렘이 묻어났다.

재료도, 방식도 달랐지만 세 사람이 도달한 곳은 같았다. 한국의 맛이 포트 와인과 가장 절묘하게 만났다는 것.
변주가 끝난 자리에서
1등을 거머쥔 임대웅 바텐더는 그라함의 초대로 포르투와 도우로 밸리를 찾아 3일간의 글로벌 파이널에서 각국 예선 우승자들과 함께 선다. 어떤 결과를 내던 이번 서울 예선이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이질적인 것들이라도 함께 껴안을 수 있다는 것. 된장, 들기름, 누룽지, 매실, 유자 등 낯선 것들이 새로운 익숙함이 되는 과정을 확인했다. 포트 와인의 고정된 이미지는 이렇게 바텐더의 손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그 끝없는 변주를 경험하고 나면 남는 건 낯섦이 아니라 기대감이다. 현장에서 포트 와인이 칵테일 베이스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충분히 봤다. 그 지평이 얼마나 넓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그라함뿐만 아니라 여러 포트와인 브랜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새로운 카테고리는 완성되고 있다.

간단하게 포트 & 토닉으로!
블렌드 넘버 5는 완벽한 포트&토닉을 만드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뜻하는 화이트 포트로 가볍고 산뜻하다. 아카시아와 라임, 민트 향이 감돈다. 저녁의 시작을 열고 싶을 때 추천! 얼음을 채운 하이볼 글라스에 50ml를 붓고 토닉워터를 채운다. 라임 한 조각과 민트 한 줄기로 충분하다.
블렌드 넘버 12는 루비 포트로 풍미가 짙고 묵직하다. 좀 더 깊은 밤에 어울린다. 얼음이 담긴 하이볼 글라스에 40ml를 넣고 드라이 스파클링 와인이나 토닉워터 60ml를 푸어링한다. 딸기 1조각, 오렌지 ¼조각을 곁들이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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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까브드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