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세계에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만큼이나 역사의 항로를 크게 바꾼 사건이 몇 있는데, 20세기에 일어난 일 중 단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이가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을 떠올릴 것이다.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떠오르는 와인 산지였던 캘리포니아 와인들이 세계적 명성의 프랑스 와인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와인 세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보르도 그랑 크뤼 1~2등급 와인들을 뒤로 하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레드 와인은 나파 밸리 스택스 립(Stag Leap) 지역의 카베르네 소비뇽이었다. 나파 밸리의 중심에 있는 이 소지역은 오늘날 단 17개 와이너리가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하며 나파에서도 '축복받은 땅'으로 불리곤 한다. 지난해 11월, 스택스 립 지역에 축배를 들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침니락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카베르네 소비뇽(Chimney Rock Stags Leap District Cabernet Sauvignon) 2021'이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2024 탑 100에서 5위를 차지했기 때문. 국내에는 아영FBC를 통해 단 240병만 들어온 이 와인은 와인 스펙테이터 탑 100 발표 당일 전 물량이 솔드아웃되었다 한다. 눈 크게 뜨고 찾아보면 아직 일부 와인샵에는 재고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머지않아 새로운 빈티지로 국내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의 새로운 신화를 이어가는 침니락 와인에 대해 알아보자.
텔라토 와인 그룹이 새 숨을 불어넣다
나파 밸리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실버라도 트레일(Silverado Trail)의 우거진 참나무 아래 펼쳐진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 양쪽으로 수많은 와이너리를 거치게 된다.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Stags Leap District) AVA로 진입하면 케이프-더치(Cape-Ducth) 스타일로 지어진 독특한 와이너리 건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침니락 와이너리(Chimney Rock Winery)다. 설립자는 해크 & 스텔라 윌슨(Hack & Stella Wilson) 부부. 케이프-더치 스타일의 와이너리 건물은 부부가 남아공에서 보낸 시절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다. 해크 & 스텔라가 이 지역의 땅을 매입한 건 파리의 심판이 열린 지 3년 후인 1979년의 일이었다. 이듬해에 약 57헥타르의 부지 중 24헥타르에 포도나무를 심으며 부부는 와이너리를 만들어 갔다. 첫 빈티지는 1984년. 당시 나파 밸리 최고의 와인메이커였고 현재에도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필립 토그니(Philip Togni)와 함께 첫 두 빈티지 와인을 생산했다. 스택스 립의 독특한 테루아와 초심자의 열정, 나파 밸리에 대한 최상의 이해도를 지닌 필립 토그니의 콜라보는 훌륭한 결과로 이어졌다. 첫 와인이 출시된 직후인 1986년에 와이너리를 방문한 전 <타임지(Times)> 기자 로버트 로렌스 발저(Robert Lawrence Balzer)가 “나파 밸리 왕관의 새로운 보석”으로 침니락을 평가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침니락 와이너리의 제2막도 열렸다. 미국 와인 산업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가문이자 오늘날 세계적인 와인의 수입사이자 마케터, 생산자인 텔라토 와인 그룹(Terlato Wine Group)이 2000년도에 파트너로 합류하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거다. 침니락이 소유한 포도밭의 뛰어난 잠재력을 확신한 이들은 테루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의 양조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01년에 건설한 최첨단 와이너리 시설과 배럴 룸이 그 결과물. 이어서 2002년에는 추가적인 19헥타르의 땅에 카베르네 소비뇽을 식재하며 규모를 키워 나갈 준비를 했다. 2004년 텔라토 와인 그룹이 침니락 와이너리의 단독 소유주가 되면서, 새로운 오너쉽과 양조 시설에 힘입어 침니락 와인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침니락 와인은 축복받은 땅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의 진정한 정수를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28개의 블록으로 나뉜 포도밭에서 세심한 관리하에 만들어진다. 와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바탕이 되는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를 먼저 살펴보자.
벨벳 장갑 속의 무쇠 주먹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는 토양의 테루아 특징을 기반으로 AVA 지위를 획득한 첫 번째 아펠라시옹이다. 나파 시(City of Napa)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으로, 세로 폭이 약 5km에 가로 폭은 약 1.6km의 좁고 긴 형태의 소지역이다. 이곳이 와인 산지로서 특별한 이유는 폭이 확장되지 않은 계곡의 낮은 지대라는 점에 있다. 바람은 통로를 따라 지나가는 법. 남쪽의 산 파블로 만에서 빨려 들어온 차가운 바닷바람이 저녁마다 포도밭을 휩쓸고 가며 낮 동안 받은 포도의 열기를 식혀 준다. 더운 여름철 야외 활동 후 차가운 마스크팩을 얼굴에 얹었을 때를 떠올려 보시라. 여기에 주변 언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도 합세해 포도의 당도와 산도는 보통의 캘리포니아 지역보다 좋은 균형을 이룬다. 천천히 익는 카베르네 소비뇽에 최적인 긴 성장기를 제공해 주어 부드럽고 신선한 풍미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뜻. 토양은 크게 수백만 년 전에 발생한 화산 폭발과 건조한 바카 산맥(Vaca Mountains Range)이 오랜 세월 침식되며 이루어진 동쪽 언덕과 자갈 등의 강 퇴적물로 형성된 혼합 양토가 있는 지대로 나뉜다. 이러한 자갈 양토와 언덕의 토양들은 포도나무의 수분 보유력을 낮게 하여, 생산량은 적지만 농축되고 뛰어난 풍미를 지닌 포도가 자라게 한다. ‘벨벳 장갑 속의 무쇠 주먹(Iron fist in a Velvet Glove)’이라는 이 지역 와인의 별명은 이러한 테루아의 결과를 탁월하게 표현한다. 우아함과 부드러움 속에 농축미와 강렬함을 갖춘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
28개 블록으로 표현한 순수함
텔라토 와인 그룹이 침니락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이듬해인 2005년, 의사 출신의 와인메이커 엘리자베스 비안나(Elizabeth Vianna)가 수석 와인메이커로 임명됐다. 올해로 꼬박 20년을 침니락과 함께해 온 그녀는 포도밭에 제초제 사용을 중단하는 등 나파 밸리의 전체론적 농업(Holistic Farming)을 이끈 선봉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침니락이 2013년 나파 그린(Napa Green) 빈야드 인증을 받고 이어서 2015년에는 나파 그린 와이너리 인증을 받은 데에도 그녀의 공이 컸다. 비간섭주의 스타일Non-Interventionist Style)으로 와인을 만드는 엘리자베스는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의 뛰어난 테루아를 표현하기 위한 최적임자였다. 지난 20년간 그녀는 침니락 포도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험적 경험을 기반으로 145헥타르의 포도밭을 28개 블록으로 나누었고, 포도밭 관리부터 포도 재배, 발효까지 각 블록의 순수함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어 왔다. 공정이 이러하니 100% 에스테이트 포도만을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 그렇다고 침니락의 양조팀이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의 테루아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다. 발효와 숙성 과정에 있어 다양한 배럴과 효모 실험을 통해 완성된 와인이 침니락이기 때문이다. “와인메이커가 되는 것은 예술과 과학을 블렌드하는 것”이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에서도 이러한 실험가적 면모가 묻어 나온다. 비간섭주의 스타일을 지향하지만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의 최상의 표현을 위한 예술적 상상력이 한 방울 더해진 와인이 침니락이 아닐까.
국내 수입되는 침니락 와인들
침니락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카베르네 소비뇽 2021
Chimney Rock Stags Leap District Cabernet Sauvignon 2021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AVA의 특징인 우아함과 힘의 균형이 완벽하게 표현된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91%에 카베르네 프랑 5%, 메를로 3%, 프티 베르도와 말벡이 0.5%씩 블렌딩되었으며,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30~40일간 포도 껍질과 함께 발효한 후 18개월간 프렌치 오크 배럴(50% new)에서 숙성하여 완성했다. 2021 빈티지는 특히 신선함과 정교함을 갖춘 다층적인 와인인데, 탁월한 균형과 우아함으로 멋있게 숙성해 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블랙 체리와 블랙 커런트, 모카의 관능적인 아로마에 우아한 세이지의 향이 풍성하게 전해진다. 과실미에 집중된 아름다운 와인으로 실키한 텍스쳐가 돋보이고, 섬세한 타닌이 미드 팔렛에서 뼈대를 이루며 긴 피니쉬로 이어진다. 와인 스펙테이터 2024 탑 100에서 5위에 올랐다.
침니락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엘바쥬 2021
Chimney Rock Stags Leap District Elevage 2021
엘바쥬는 와인 세계에서 다양한 캐릭터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각 블록에서 생산된 포도 품종의 세심한 구성과 블렌딩을 통해 아름다운 앙상블로 우아하게 균형을 이룬 와인이다. 2021 빈티지의 경우 메를로 55%에 카베르네 소비뇽 29%, 프티 베르도 13%, 말벡 3%를 블렌딩했고, 30~40일간 저온에서 포도 껍질과 함께 발효한 후 18개월간 프렌치 오크 배럴(90% new)에서 숙성을 거쳤다. 무척 표현력이 좋은 블랙베리와 카시스, 바닐라의 생기 있는 아로마에 바이올렛과 타르 향이 어우러진 와인. 과일과 꽃을 중심으로 향이 펼쳐지며, 풀바디한 한편 부드러운 타닌이 피니쉬까지 우아하게 지속된다.
문의 아영FBC
▶홈페이지 winenara.com
▶인스타그램 @ayoungfbc
글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아영F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