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고성과 포도밭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와인 산지, 루아르 밸리의 시작점엔 상세르가 있다. 메인 품종은 소비뇽 블랑. 원채 개성이 강한 이 품종도 테루아를 담아내기 위해 영혼을 끌어 모아야 할 정도로 매력적인 테루아를 지닌 지역이다. 도멘 앙리 부르주아(Domaine Henri Bourgeois)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자이자, 상세르의 중심지 사비뇰(Chavignol)에서 시작된 가족 경영 와이너리이다. 지난 5월, 도멘 앙리 부르주아의 오너 장-마리 부르주아(Jean-Marie Bourgeois)가 한국을 방문했다. 눈빛과 목소리, 모든 제스처에 애정을 가득 담아 자신의 와인을 소개한 이 명장으로부터, 와인업계에서 다소 진부할 정도로 흔히 쓰이는 ‘테루아를 담은 와인’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관용구가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상세르에서 푸이 퓌메를 거쳐 뉴질랜드 말보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 오는 동안 한결같이 테루아에 중점을 두고 와인을 생산해 온 앙리 부르주아의 이야기, 오너 장-마리 부르주아와 커머셜 디렉터 장-다비드 코스터그(Jean-David Costerg)로부터 들어 본다.

‘함께’의 미학
도멘 앙리 부르주아는 장-마리 부르주아의 아버지대에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상세르 사비뇰 마을에서 단 1.5헥타르로 시작한 도멘 앙리 부르주아는 오늘날 상세르와 푸이 퓌메에 걸쳐 총 72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가족 경영의 힘이 컸다. 장-마리 역시 이를 강조했다. “도멘 앙리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가치는 가족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도 가족들이 함께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만들었고, 현대에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말이 가족 경영이지, 세상에서 가장 편한 관계가 모여 비즈니스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일 테다. 커머셜 디렉터 장-다비드로부터 이와 관련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가족 경영이 긴 시간 유지되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많은 가족 경영 와이너리가 갈등이 생겨 무너진다. 앙리 부르주아가 대를 이어온 건 그만큼 끈끈한 관계를 위해 서로 노력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와이너리 운영에는 9대손인 장-마리 부르주아에 이어 10대손들도 참여하고 있다. 장-마리의 아들인 아르노(Arnaud)와 리오넬(Lionel), 조카인 장 크리스토프(Jean Christophe)가 그 10대손들. 특이하게도 이들은 역할을 뚜렷하게 나누지 않는다. 포도 재배든 와인 양조든 가족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만드는 것이 앙리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의 명함에 비녜롱(Vigneron)이라고만 적혀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테루아의 교과서
2023 빈티지부터 앙리 부르주아의 모든 포도밭은 유기농 인증에 의해 관리된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10대를 이어 온 가문이기에, 유기농 인증을 받는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앙리 부르주아가 상세르 내에서 테루아를 잘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유도 결을 같이 한다. 항상 자연을 가까이해 왔기에 일찍이 포도밭마다 토양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고, 1984년부터는 하나의 와인에 하나의 테루아만 담아 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앙리 부르주아가 상세르 지역에서 싱글 빈야드 와인의 선구자라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현재 도멘은 상세르를 중심으로 푸이 퓌메를 아울러 130개가 넘는 다양한 포도밭 플롯을 소유하고 있다. 앙리 부르주아가 뿌리내린 상세르의 테루아는 토양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장-다비드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가장 흔한 석회석 점토(Limestone & Clay)가 있다. 아주 오래 전인 1억 5천만 년 전에 형성된 이 토양은 상세르 땅의 60%에 해당하며 입자가 커 배수가 잘되는 특징이 있다. 주로 과실미가 좋으면서 크리스피하고 신선한 산미가 돋보이는 스타일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다음으로 키메르지앙 이회토(Kimmeridgian Marls)가 있다. 약 1억 4천만 년 전에 바다였던 땅이 육지화된 토양으로, 상세르의 10%가 해당한다. 앞서 살펴본 석회석과 비교하면 점토의 양이 더 많고, 해양 화석성분의 영향으로 미네랄리티와 솔티니스, 요오드의 특징이 강조된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된다. 마지막으로 상세르보다 푸이 퓌메에서 좀 더 잘 알려진 실렉스(Silex)가 있다. 5,600만 년 전에 형성되었고, 흔히 부싯돌이라 불리는 화석토로 이루어져 와인에 독특한 연기 향과 섬세한 미네랄리티를 부여한다. 각 토양을 설명하는 동안 장-마리는 보석함과 같은 상자에서 토양 샘플을 꺼내 보여주었다. 키메르지앙 자갈 조각에서는 실제로 조개껍질과 같은 유기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두 조각의 실렉스(부싯돌)는 마찰을 가하자 매캐한 연기 향을 피워냈다. 이러한 토양들은 앙리 부르주아의 와인에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오너와의 만남에서 테이스팅한 세 종의 와인으로 살펴 보자.

앙리 부르주아 푸이 퓌메(Henri Bourgeois Pouilly Fume) 2023
석회석과 점토가 혼합된 토양에서 재배된 포도로 100%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완성한 와인이다. 장-마리는 이 와인을 “아로마를 찾기 쉬운 스타일”로 정의하며 “섬세하고 여성스럽고 우아한 와인”으로 소개했다. 그의 말대로 푸이 퓌메는 뒤에 만나볼 상세르보다 과일 아로마가 좀 더 쥬시하게 다가왔다. 시트러스, 키위, 복숭아, 사과 등 과일과 허니서클과 같은 꽃의 아로마가 살집 있게 느껴지고, 석회질 미네랄리티와 높은 산미가 섬세한 미감을 주는 와인. 2023 빈티지는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으로부터 92점을 받았다.
앙리 부르주아 상세르 레 바론(Henri Bourgeois Sancerre Les Baronnes) 2023
상세르 지역 특유의 점토와 석회석 토양에서 자란 포도를 엄선하여 만든 와인이다. 푸이 퓌메와 마찬가지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와 숙성을 했다. 장-마리는 “석회질과 요오드, 짭조름한 미네랄리티 등 테루아의 특징이 더 잘 보인다. 구조감이 좋고 투박하면서도 그 안에서 매력이 넘치는 와인”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만나본 푸이 퓌메보다 과일 아로마는 절제되어 있지만, 미묘한 미네랄리티에서 상세르 지역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와인. 높은 산미로 인해 소비뇽 블랑의 크리스피함이 좀 더 강조된다. 장-마리는 크림소스의 흰살 생선 요리에 곁들일 것을 추천했다.
앙리 부르주아 당탕(Henri Bourgeois d’Antan) 2023
당탕이 서빙되자 장-마리는 “앞선 두 와인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와인”이라고 운을 뗐다. 상세르에서 루아르 강을 따라 형성된 전형적인 실렉스 토양에서 자란 올드바인 포도로 만들어지기 때문. 장-마리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실렉스 토양에서 기인한 미네랄이 메인인 와인으로, 먼저 맛본 두 와인에서 느꼈을 꽃 향을 전혀 느낄 수 없을 거다.” 설명과 함께 마신 한모금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실렉스 자갈 샘플을 부딪혔을 때 느꼈던 매캐한 연기 향이 기저에 깔려 있고, 시트러스와 비스킷, 꿀, 시원한 숲의 향에 기분 좋은 쌉싸래함이 복합적으로 전해지는 우아한 와인. 장-마리는 생선류나 랍스터와의 매칭을 가장 선호한다면서, 가금류, 송아지, 흰 살코기와도 잘 어울린다고 추천했다.

뉴질랜드 테루아와 프랑스 전통의 만남, 끌로 앙리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장-마리 부르주아는 상세르의 주요 품종인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테루아를 찾아 나섰다. 더위를 좋아하지 않는 소비뇽 블랑의 크리스피한 산미와 신선함을 잘 지킬 수 있는 곳으로. 9년간 전 세계 와인산지를 돌아본 후 장-마리는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뉴질랜드 말보로를 택했다. 동쪽의 클라우디 베이로부터 바닷바람이 내륙으로 밀려 들어오고, 남북으로 마주한 산맥이 포도나무를 감싸주는 곳, 그가 매입한 와이라우 밸리(Wairau Valley)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미개간지는 장-마리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앙리 부르주아만의 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 뉴질랜드식 포도나무가 심기지 않은 땅을 원했으므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끌로 앙리(Clos Henri)라 이름 붙인 이 와이너리는 오늘날 전체 98헥타르 중 절반가량을 자연 그대로의 숲으로 남겨둔 채 유기농 인증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포도밭은 2011년부터 바이오다이나믹 방식으로 관리되는데, 현재 디미터(Demeter) 인증 과정 중에 있다고 한다.

오랜 역사의 프랑스 와인 생산자가 비교적 신생 와인 산지인 뉴질랜드에 설립했다는 점에서 끌로 앙리는 상징성을 지닌다. 몇백 년간 가문에 축적되어 온 테루아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뉴질랜드 와인에 접목하기에. 끌로 앙리를 대표하는 토양은 빙하기에 형성된 오티라(Otira)와 와이마웅가(Waimaunga)다. 큰 자갈이 언덕에서 구르고 굴러서 축적된 오티라와 말보로의 강한 바람에 깎이고 깎여서 입자가 고와진 와이마웅가가 섞인 토양에서, 끌로 앙리는 프랑스에서의 노하우를 활용하여 테루아가 최대한 반영된 와인을 만들어낸다. 커머셜 디렉터 장-다비드는 이 외에도 두 가지점을 강조했다. 바로 고밀도 식재와 드라이 파밍(Dry Farming). 끌로 앙리는 1에이커당 5천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는다. 이는 말보로 평균인 에이커당 2천 그루보다 절반 이상 많은 수치인데, 장-다비드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밀도 식재를 하면 포도나무는 좁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양분을 찾아 땅 깊숙이 뿌리를 뻗는다. 그 결과 산출량은 적지만 좋은 힘을 지닌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드라이 파밍 역시 고밀도 식재의 결과물로 힘이 좋은 포도가 열리기에 가능하다. 관개를 하지 않음으로써 포도가 지닌 에너지와 자연적인 물로만 포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수많은 말보로 와이너리 중에서도 끌로 앙리가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질랜드의 테루아를 표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자 가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만든 끌로 앙리의 와인 3종을 만나보았다.

끌로 앙리 이스테이트 소비뇽 블랑(Clos Henri Estate Sauvignon Blanc) 2023
끌로 앙리의 이스테이트 포도밭의 여러 테루아를 보여주는 소비뇽 블랑이다. 오너 장-마리는 “상세르의 섬세함과는 다른 뉴질랜드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라고 소개하면서도 “고밀도 식재와 드라이 파밍을 통해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특유의 식물성 느낌을 없앴다”라고 덧붙였다. 헥타르당 생산량이 적은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다. 뉴질랜드의 대형 와이너리들이 보통 헥타르당 8~9천 병을 생산하는 반면 끌로 앙리는 4~5천 병만 생산한다. 생산량이 많으면 소비뇽 블랑의 그린 노트가 도드라지기 쉽고, 적을수록 미네랄리티가 강조된 섬세한 와인이 만들어진다는 거다. 오너와의 만남에서 맛본 와인은 확실히 말보로 소비뇽 블랑의 풀 향이 적으면서도 자몽, 패션프루트, 파인애플 등 과실미가 섬세하게 펼쳐졌다.
끌로 앙리 이스테이트 피노 누아(Clos Henri Estate Pinot Noir) 2022
소비뇽 블랑과 마찬가지로 이스테이트 포도밭의 여러 테루아를 보여주며, 고밀도 식재와 드라이 파밍을 통해 힘과 농축된 과실미가 있는 피노 누아다. 대형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하여 오크 터치와 피노 누아의 과일 캐릭터가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량 생산되어 종종 투박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 비슷한 가격대의 말보로 피노 누아들과 다르게 피노 누아의 향긋함이 잘 표현되었다. 라즈베리, 딸기, 체리, 허브, 꽃, 흙의 향이 화사하면서도 직관적으로 피어나고, 밝은 산도와 촘촘한 타닌, 활기 넘치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와인.
끌로 앙리 와이마웅가 싱글 빈야드 피노 누아(Clos Henri Waimaunga Single Vineyard Pinot Noir) 2020
끌로 앙리의 대표 토양 중 입자가 고운 와이마웅가 진흙 토양에서 재배된 피노 누아 포도만 사용한 와인이다. 고밀도 식재와 드라이 파밍,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 등 끌로 앙리의 기본기에 더해 좀 더 섬세한 양조 기술을 적용했다. 손수확한 포도의 20%는 홀 클러스터로, 나머지는 줄기를 제거한 후 자연 발효했다. 12개월간 100% 프렌치 오크 배럴(New 20%)에서 숙성. 생동감 넘치는 체리와 자두, 허브의 아로마에 가죽, 흙, 감초가 더해져 복합적인 매력을 뽐낸다. 중간 이상의 산도와 벨벳 타닌이 좋은 구조감을 형성하고, 피니쉬에 길게 남는 잔향이 프리미엄 피노 누아임을 보여준다.

약 두 시간 동안 세미나 형식의 테이스팅을 이끌며 오너 장-마리 부르주아는 참석자들에게 매 와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자리가 끝나갈 때쯤 그가 남긴 한 마디가 마음을 울렸는데, “나는 전 세계 모든 와인을 사랑하고 또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건 중요하고 그런 의견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그게 본인한테도 자극이 된다”라고. 오래된 가족 경영 와이너리의 수장이자 평생 와인을 만들어 왔을 베테랑 와인 생산자가 여전히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는 것, 이런 오너가 만든 와인엔 마음이 한 번 더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나라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