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펠라의 도멘 리가스: 자연을 선택한 40년

Written by천 혜림

‘내추럴 와인’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그리스에서 40여 년간 자연주의 양조를 이어온 도멘 리가스(Domaine Ligas)의 시간이 겹쳐 있다. 자연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방식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닌 유일한 길이었다.

지난 4월, 창립자 토마스 리가스(Thomas Ligas)와 그의 딸 멜리 리가스(Meli Ligas)가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올해 70세를 맞은 토마스, 그리고 그 시간을 이어가는 멜리 리가스. 한국 수입사 이스티 와인즈의 김동훈 대표와의 오찬으로 이어진 이번 만남은, 그들의 와인을 만든 시간과 태도를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스럽다’는 과연 무엇일까.

도멘 리가스의 창립자 토마스 리가스(Thomas Ligas)와 그의 딸이자 와인메이커 멜리 리가스(Meli Ligas)

도멘 리가스 여정의 시작

도멘 리가스 40년 역사의 중심에 있는 토마스 리가스의 양조 여정은 프랑스 유학 시절, 생화학을 공부하던 때 시작되었다. 과학적 접근과 농가 출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양조학을 선택했지만, 그리스로 돌아온 그가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1980년대 그리스 와인 산업은 정형화된 이론과 대규모 생산 방식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딸 멜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는 화학적 접근이 과정의 이해에는 도움이 된다고 보셨지만, 그것이 와인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이론적인 레시피에 갇히면 와인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프랑스와 테루아가 전혀 다른 그리스에서 보르도를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에 의문을 가졌다. 당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메를로와 카베르네 소비뇽 대신, 1985년 그리스 토착 품종을 심기로 결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본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는 땅을 조금씩 임대하고 매입하며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국제 품종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을 심으며 방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터를 잡은 북부 그리스 펠라(Pella)는 한때 와인을 대량 수출하던 지역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기계화가 가능한 작물에 밀려 포도 재배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효율을 택하던 시기였다. 그리스 농업이 트랙터로 해치우는 ‘속도’에 집중할 때, 토마스는 느리고 고된 ‘수작업’의 가치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40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외면받던 땅에는 다시 젊은 와인메이커들이 돌아오고 있고, 펠라의 와인은 새로운 흐름 속에서 다시 읽히고 있다.

무당벌레와 같은 생명체가 공존하는 도멘 리가스의 포도밭(좌)과 로고(우)

자연이라는 거대한 순환계

토마스 리가스의 선택은 단순히 그리스 토착 품종을 심는 데 그치지 않았다. 포도밭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의 차이였다. 1980년대, 대다수 생산자가 화학비료에 의존하며 와인을 ‘만드는(Making)’ 기술에 집중하던 시기, 그는 땅과 그 안의 순환계에 주목했다. 오늘 우리가 도멘 리가스의 와인에서 느끼는 응축된 에너지는, 양조장이 아닌 포도밭에서 시작된다.

그의 이러한 접근은 농가에서 자란 배경에서 비롯됐다. 토양은 단순한 생산 수단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었고, 흙을 대하는 태도 역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여기에 1980년대, 『짚 한 줄기의 혁명』의 저자 마사노부 후쿠오카가 그리스 에데사에서 진행한 세미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강의를 통해 그는 인위적 개입을 줄이고 자연의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학교에서 익힌 과학적 지식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남았고, 그 위에 비개입의 원칙이 더해지며 리가스만의 농법이 자리 잡았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퍼머컬처(Permaculture: 영구농법)를 기반으로 포도밭을 관리한다. 정돈된 농지가 아니라 자생적인 생태계로 유지하는 방식이다. 자연의 순환을 끊지 않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토마스 리가스. 그의 포도밭에서는 풀을 베지 않는다. 무성한 잡초는 토양의 수분을 유지하고, 뜨거운 그리스 기후 아래에서 지표면의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다양한 곤충이 공존하며 자연스러운 균형을 형성한다. 그는 이 관계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순한 언어”라고 설명한다. 화학 제품을 뿌리는 순간 이 미묘한 균형은 깨지고, 인간은 영원히 화학 물질에 의존해야 하는 굴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들은 병충해를 치료하려 하기보다, 강건한 생태계를 조성해 포도나무 스스로 면역력을 갖도록 예방하는 통찰을 실천하고 있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빚어낸 도멘 리가스의 농업은, 토양 독성이 강한 구리 대신 가루 유황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며, 습도가 높은 시기에는 실리카가 풍부한 야생 허브 ‘쇠뜨기(Horse tail)’ 추출액을 직접 제조해 포도의 면역력을 높인다. 결국 리가스의 와인은 인위적인 기술로 맛을 만든 산물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일궈낸 생명력을 정직하게 병에 옮겨 담은 결과물이다.

포도나무 사이사이로 무성하게 자라있는 잡초들

그리스 토착 품종을 다시 끌어올리다

토마스 리가스는 1980년대, 대량 생산이나 블렌딩용으로만 치부되던 ‘로디티스(Roditis)’ 품종의 잠재력을 다시 들여다보는 데 집중했다. 대형 와이너리들이 양을 늘리는 데 주력하던 방식과 달리, 그는 헥타르당 20헥토리터라는 극도로 낮은 생산량을 고수하며 로디티스 고유의 풍미와 품질을 복원하고자 했다. “로디티스를 대량 생산하면 흥미로운 와인을 만들기가 어렵다. 예전에 그리스의 대형 회사나 공장들은 와인을 희석하고 양을 늘려 팔기 위해 로디티스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개입과 낮은 생산량에 집중해 로디티스 본연의 매력을 살릴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좋은 해에 헥타르당 30헥토리터까지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규모가 작고 대량 생산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농축된 와인을 만들고, 슈퍼마켓이나 대량 생산 시장이 아닌 다른 시장을 위해 와인을 만든다.” 이 지역 일부 생산자들이 헥타르당 100헥토리터 이상을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리가스의 방식은 수익성보다 품질과 신념에 집중한 선택에 가깝다. 도멘 리가스는 로디티스 외에도, 같은 철학 아래 레드 품종으로는 시노마브로(Xinomavro), 모스코마브로(Moschomavro), 림니오나(Limniona)를, 화이트 품종으로는 아시리티코(Assyrtiko), 키도니차(Kidonitsa)를 활용해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독립적인 자아, 멜리 리가스의 여정

아버지가 시작한 길이라도, 딸 멜리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독립적인 존재다. 그녀는 가업을 잇기 전 프랑스 등지의 여러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일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쉬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에서 영감을 얻되 나만의 정체성을 담고 싶었다. 결국 100%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

그녀는 조직과 사람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며 단단한 내면을 길렀고,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그리스 와인 산업의 시선에 당당히 맞서며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아버지 토마스는 자신의 ‘바리크(Barrique)’ 시리즈를 “강인한 여성 같은 와인”이라 설명하며, 레이블의 네 번째 주인공은 바로 스스로의 알을 깨고 나온 멜리가 될 것이라며 농담을 던진다.

사진 설명: (순서대로)
도멘 리가스의 바리크 시리즈는 빈티지한 감각과 예술적 서사를 레이블에 담아낸다. 키도니차 바리크(Kydonitsa Barrique)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배우 카티나 팍시누(Katina Paxinou), 아시르티코 바리크(Assyrtiko Barrique)은 배우이자 정치인인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로디티스 바리크(Roditis Barrique)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를 각각 레이블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2018년부터 양조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된 멜리는 와인을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녀에게 산소는 차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와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동맹’에 가깝다. 이산화황 첨가 없이 와인이 스스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장 성장을 위해 와인을 병에 담기도 전에 죽이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말처럼, 와인은 인간처럼 시간을 통해 완성되는 자연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이 바탕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양조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기후 변화로 포도 자체의 타닌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와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멜리는 오크 향이 원재료의 개성을 가리지 않도록 모든 공정을 오스트리아 스토킨져(Stockinger), 대형 오크통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가업의 전통 위에 자신만의 섬세한 감각을 더한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토마스 리가스는 딸의 와인을 두고 “여성의 참여는 조금 더 어머니 같은 모성애적 터치를 더한다”고 표현하며, 멜리의 손길이 닿은 와인이 한층 부드럽고 즐거운 풍미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멜리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숨기지 않는다. “펫낫(Pét-Nat)을 만들 때는 정말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일하기도 한다. 그게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나'이니까.” 와인을 만드는 과정 역시 통제된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과정의 일부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는 도멘 리가스

와인을 수입할 때 어떤 애정과 의지를 가지고 접근하느냐는, 그 와인이 한 시장에서 어떻게 소개되고 자리 잡는지를 좌우한다. 멜리는 이스티 와인즈의 김동훈 대표를 도멘 리가스의 한국 앰버서더와 같은 존재로 표현했으며, 실제로 현장에서 느껴진 두 관계는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 와인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긴밀한 협업에 가까웠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스티 와인즈는 도멘 리가스의 거의 전 라인업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포트폴리오는 그리스 펠라 지역의 테루아를 기반으로, 토착 품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구성된다.

한국에서 꾸준히 사랑받아온 오렌지 와인 계열로는 아시르티코로 만든 람다(Lamda)와, 로디티스를 기반으로 송진을 함께 발효하는 레치나 스타일의 요마타리(Yomatari)가 있다. 특히 요마타리는 국내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다. 오렌지 와인의 바리크 시리즈인 '키도니차 바리크(Kydonitsa Barrique)', '아시르티코 바리크(Assyrtiko Barrique)', '로디티스 바리크(Roditis Barrique)'는 오크 숙성을 통해 보다 구조감 있는 스타일을 구현하며, '키도니차 암포라(Kydonitsa Amphora)'와 '로디티스 암포라(Roditis Amphora)'는 암포라 숙성을 통해 보다 순수하고 질감이 강조된 스타일을 표현한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로디티스를 기반으로 한 '로디티스'가 있으며, 레드 와인으로는 시노마브로로 만든 Xi-Ro, 림니오나를 사용한 Limniona Amphora가 있다. 여기에 시노마브로로 만든 로제 스타일의 '르 로제(Le Rose)'까지 함께 선보인다. 이처럼 레드, 화이트, 로제, 오렌지, 블랑 드 누아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구성은 그리스 토착 품종의 다양성과 리가스 특유의 비개입 철학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한국 파인 다이닝이 주목하는 도멘 리가스

도멘 리가스는 최근 한국의 하이엔드 파인 다이닝 씬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식당’, ‘권숙수’, ‘산’, ‘에빗(Evett)’, ‘빈호’ 등 유수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이 리가스의 와인을 페어링 리스트에 올리고 있다. 이는 정교하고 섬세한 요리와 충돌하지 않는 리가스 특유의 ‘순수한 투명성’이 인정받은 결과다.이러한 특성은 한식과의 페어링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흔히 한식과 와인의 조합이 어렵다고 여겨지지만, 리가스의 와인은 제철 봄나물이나 파전처럼 기름진 요리의 감칠맛을 부담 없이 받쳐준다. 김동훈 대표는 특히 오렌지 와인 스타일의 레치나 ‘요마타리’를 한식 페어링의 핵심으로 꼽는다. 전체적으로 13% 내외의 낮은 알코올 도수와 신선한 산도를 유지하는 리가스의 와인은, 음식과의 균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토마스 리가스는 “와인은 머리로 분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마시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매개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멜리 역시 한국 소믈리에들의 감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특히 와인을 오픈한 채 한 달 동안 보관하며 그 ‘진화’ 과정을 글라스로 서빙하는 시도는 생산자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멜리는 한국의 미식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전했다.

“한국 음식은 세계 어느 요리보다도 훌륭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자부심을 가지고, 고정관념 없이 이 미식의 여정을 계속 즐겨주길 바란다. 여러분의 즐거움이 곧 와인 문화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식탁 위에 올리는 작은 자연

2시간 30분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토마스 리가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을 만나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 정직하게 만들어진 와인 한 병을 식탁에 올리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공간에 자연을 초대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다."

인터뷰 끝에 멜리와 토마스 리가스는 와인이 결국 ‘자연이 준 선물’임을 거듭 강조했다. “생산자는 바뀌어도 포도를 주는 것은 언제나 자연이다. 와인을 들판에서 온 하나의 과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가 전하려는 즐거움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믿는다.” 멜리는 직접 맛을 비교하며 느끼는 즐거움이 지식보다 더 깊은 이해를 불러온다고 말한다. "그저 즐기길. 우리가 포도밭에서 느끼는 행복을 함께 느끼길 바란다." 자신의 감각에 집중해 볼 것을 권하는 따뜻한 당부였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농장에 동물을 도입해 생태계의 자생력을 높이는 것이다. 제초기 대신 양이 풀을 먹고, 말과 함께 포도나무를 돌보는 풍경은 그들이 지향하는 퍼머컬처의 연장선에 있다. 또한 와인을 서둘러 출시하기보다, 와이너리에서 충분히 숙성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도멘 리가스는 지난 20년의 성취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를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

수입사 이스티 와인즈
▶인스타그램 @yeastywines

천혜림 사진·자료 제공 이스티 와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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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6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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