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롤로(Barolo)는 흔히 ‘와인의 왕’이라 불리지만, 그 왕국은 저마다 다른 토양을 지닌 포도밭과 마을로 촘촘히 나뉜 모자이크에 가깝다. 같은 네비올로(Nebbiolo)라도 어느 밭에서 왔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다른 와인이 나오는 곳, 그 다채로움이 바롤로의 매력 중 하나다. 이 왕국을 구성하는 주요 코무네(Comune) 중 하나인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에 마을과 가문, 포도밭이 모두 ‘바우다나(Baudana)’라는 한 이름으로 이어지는 흔치 않은 와이너리가 있다. 작년 말 국순당을 통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루이지 바우다나(Luigi Baudana)이다. 지난 5월, 루이지 바우다나의 와인메이커 겸 아시아·태평양 총괄 멍야오 유진 치아오(Mengyao Eugene Qiao)가 한국을 찾았다. 2013년부터 바롤로 지역에서 와인을 만들어 온 그녀는 “바롤로가 황금기를 맞이했다”라며, 이 눈부신 시기에 대한 이야기와 직접 양조한 와인들을 꺼내 놓았다.

세 번 불리는 이름, 바우다나
바롤로 산지는 중앙의 ‘바롤로’를 비롯하여 11개의 행정 구역 코무네가 모여 완성된다. 루이지 바우다나의 와인은 그중 세라룽가 달바 안의 작은 마을 바우다나에서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름이다. 와이너리를 세운 사람의 성(姓)도, 그가 뿌리내린 마을도, 그가 일군 싱글 빈야드도 모두 ‘바우다나’다. 바롤로 전역에서 가문명이 곧 마을 이름이자 포도밭 이름인 유일한 사례라 한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루이지 바우다나 와이너리의 설립자 루이지 바우다나(Luigi Baudana)는, 2009년 은퇴하며 유명 바롤로 생산자인 지디 바이라(GD Vajra) 가문에 와이너리를 맡겼다. 물려줄 자손이 없는 자신의 대에서 와이너리가 끝나지 않길 바라서였다.

손수 가꿔온 와이너리를 지디 바이라에 넘긴 배경에는 바이라 가문의 수장 알도 바이라(Aldo Vajra)와의 우정이 있다. 같은 바롤로 와인 산지에 있으면서도 50대에 이르러서야 처음 조우한 두 사람은 화이트 와인에 대한 공통의 열정을 발견하고 두터운 우정을 쌓게 된다. 은퇴를 결심한 루이지 바우다나는 오랜 교류로 자신의 와인을 잘 이해하고 있고 와이너리도 잘 이어갈 인물이 알도 바이라라고 확신했고, 이 신뢰를 바탕으로 지디 바이라에 와이너리를 넘기게 된다. 그의 바람대로 바이라 가문은 현재 포도 재배부터 양조까지 루이지 바우다나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며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포도밭 규모는 단 3헥타르. 80헥타르에 15종이 넘는 레이블을 가진 지디 바이라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작은지 상상이 되리라. 본래 단 세 종의 바롤로만 연간 1만 2천병가량 만들던 이 작은 부티크 와이너리는 지디 바이라와 함께하며 랑게 비앙코(Langhe Bianco)와 랑게 로소(Langhe Rosso)를 포트폴리오에 추가했다. 국내에는 전 라인업이 수입되는데, 와인메이커 유진과의 만남에서는 랑게 로쏘를 제외한 4종을 테이스팅할 수 있었다.

레드의 땅에서 화이트를 꿈꾸다
2009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음에도 루이지 바우다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2010년 첫 빈티지로 탄생한 랑게 비앙코가 그 증거. 앞서 루이지 바우다나와 알도 바이라가 가까워진 이유가 화이트 와인에 대한 공통의 열정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밭에 소량의 청포도를 재배해 왔는데 사연은 이러하다. 먼저 부르고뉴 블랑 러버였다는 루이지 바우다나. 그는 고가의 부르고뉴 와인을 계속 사 마시느니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포도밭에 샤르도네와 내친김에 소비뇽 블랑까지 심었다. 알도 바이라의 경우 리슬링에 특별한 애정을 지녔다. 1985년 피에몬테 지역에 처음으로 리슬링 포도나무를 가져온 인물이 다름아닌 알도 바이라라고 하니 애정의 깊이가 짐작된다. 루이지 바우다나 와이너리의 소유권이 지디 바이라에 넘어간 이후, 2010년에 두 사람은 각자의 땅에서 나온 화이트 포도를 모아 랑게 비앙코를 만들었다. 각 가문의 양으로는 제품화하기에 부족했던 화이트 포도를 합쳐 보자는 소박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와인이었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롤로 지역 토착 품종인 나쎄타(Nascetta)가 추가되었다는 것. 노벨로(Novello)에 단 두 줄 심어둔 것이 전부일 만큼 소량이지만 세미 아로마틱 품종 특유의 매혹적인 향을 와인에 더한다고 한다.

유진과 함께 테이스팅한 랑게 비앙코는 2024 빈티지였다. 블렌딩은 샤르도네 44%, 소비뇽 블랑 42%, 리슬링과 나쎄타가 14%. 이 용감한 블렌딩은 ‘용기’와 ‘용감함’을 상징하는 레이블의 서양 용 그림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와인을 완성한 루이지와 알도가 한 지역 아티스트에게 와인을 보내 ‘맛보고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녀는 구릉이 굽이치는 세라룽가 달바의 언덕이 용의 등과 닮았다고 하며 며칠 뒤 한 마리 용을 그려 보냈고, 이 그림은 그대로 와인의 레이블이 되었다. 와인이 만들어진 장소를 표현하면서도, 좀처럼 블렌딩하지 않는 품종으로 과감한 시도를 한 두 사람의 ‘용기’를 상징하기에 더없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 동일한 이유에서 와인의 이름도 ‘랑게 비앙코 드래곤(Langhe Bianco Dragon)’이라 붙였다. 이날 테이스팅한 2024 빈티지는 시트러스를 중심으로 다소 따뜻했던 해의 영향으로 샤르도네 특유의 핵과류 과일 향이 돋보였다. 오크를 쓰지 않고 전량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했지만, 샤르도네는 바토나주(bâtonnage)를 거쳐 볼륨감과 크리미한 풍미를 끌어냈다고. 어울리기 쉽지 않은 품종을 블렌딩했음에도 와인메이커가 “더운 여름에 가볍게 즐기기 좋은 와인”이라 소개할 만큼 네 품종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교과서적인 세라룽가 달바
세 바롤로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와인은 ‘바롤로 세라룽가 달바(Barolo del Comune di Serralunga d’Alba)’이다. 세라룽가 달바에서 나온 와인이라 더 넓은 범위인 일반적인 바롤로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이지 바우다나는 세라룽가 달바에 바롤로 크뤼라 할 수 있는 MGA 세 곳, 바우다나, 체레타(Cerretta), 코스타벨라(Costabella) 등 세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다. 다 합쳐도 3헥타르에 불과한 이 땅에는 1950년대에 심어진 올드바인부터 1990년대 심어진 영 바인까지 다양한 수령의 포도나무가 심겨 있는데, ‘바롤로 세라룽가 달바’는 세 밭의 영 바인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다.

와인메이커 유진은 이 와인이 세라룽가 달바의 클래식한 스타일임을 강조했다. 바롤로 와인 산지를 크게 좌우로 나누었을 때, 오른쪽에 자리한 세라룽가 달바는 가장 먼저 융기한 땅으로 보통 강건하고 근육질의 바롤로가 생산된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왼쪽에 있는 라 모라(La Morra)에서는 주로 우아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의 바롤로가 생산된다. 그렇다고 이날 테이스팅한 세라룽가 달바 바롤로가 모두 강건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세라룽가 달바 안에서도 포도밭의 입지와 토양에 따라 와인의 스타일이 다르고, 빈티지의 영향도 있기 때문이다. 2020 빈티지로 테이스팅한 ‘바롤로 세라룽가 달바’는 지금 마시기에 아주 편안했다. 전반적으로 온화했고, 포도 숙성기가 길게 이어진 빈티지여서 좀 더 부드러운 스타일의 와인이 나왔다는 게 유진의 설명이다. 물론 숙성을 통해 더 발전해 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빈티지를 노래하는 밭
앞서 소개한, 루이지 바우다나라는 사람이 바우다나 마을의 바우다나 포도밭에서 빚은, 특별한 싱글 빈야드 와인을 만나볼 차례다. 사실 바우다나 싱글 빈야드 와인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만나기 쉽지 않다. 바우다나 포도밭을 소유한 생산자가 단 네 곳뿐인 데다, 그마저도 대부분 다른 밭의 포도와 블렌딩하기 때문이다. 바우다나를 오롯이 단일 밭으로 병입한 와인은 그만큼 귀할 수밖에 없다. 같은 세라룽가 달바에 있더라도 바우다나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체레타와 토양부터 다르다. 세라룽가 달바 특유의 점토와 석회토 위로 라 모라(La Morra)를 떠올리게 하는 토양이 얹어지는 게 핵심. 이 두 겹의 토양 덕분에 바우다나는 체레타보다 한결 부드럽고 우아한 결을 지니면서도, 그해의 기후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뛰어난 빈티지 표현력을 보여준다.
바롤로 2021은 많은 와인 전문가가 호평을 쏟아낸 빈티지이다. 극심한 더위 없이 따뜻하고 긴 생장기를 거쳐, 좋은 산도와 타닌, 아로마 성분이 잘 발달된 해로 알려져 있는데, 유진 역시 테이스팅에 앞서 “1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빈티지”라 표현했을 정도다. 빈티지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밭인 만큼 바우다나 2021은 붉은 과실과 꽃의 아로마가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원숙하면서도 힘 있는 타닌과 균형을 잡아주는 산도,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는 풍미가 돋보였다.

변하지 않는 파워
바우다나와 이웃해 있지만 체레타는 사뭇 다른 얼굴을 지녔다. 세라룽가 달바의 토양을 완벽하게 품고 있어, 이 지역 바롤로 특유의 강건하고 골격 좋은 스타일을 그대로 드러낸다. 17곳이 넘는 생산자가 나눠 가질 만큼 세라룽가 달바를 대표하는 밭이기도 하다. 빈티지에 따라 표정이 크게 달라지는 바우다나와 달리, 체레타는 추운 해든 더운 해든 웬만해선 강하고 단단한 캐릭터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전형적인 세라룽가 달바’를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밭으로 꼽힌다. 2021 빈티지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검은 베리류 과일에서 시작하여 더욱 복합적인 아로마 프로필과 강건하고 집약된 풍미로 그 명성에 부응했다.
루이지 바우다나는 세 종의 바롤로를 모두 같은 방식으로 양조한다. 핵심은 긴 스킨 컨택. 와인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40~60일가량 포도 껍질과 침용시킨다. 이후 1,000~1,500리터 용량의 대형 슬라보니안 오크에서 숙성하며, 올드 프렌치 오크도 약간 더해 복합미를 보태기도 한다. 마주한 밭에서 한 해에 나온 포도로 동일한 방식으로 양조함에도 전혀 다른 와인이 완성된다는 것, 바롤로의 마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롤로의 황금기인 이유
2021년을 필두로 훌륭한 빈티지가 이어지는 지금을 두고 유진은 “바롤로가 황금기를 맞이했다”라고 표현했다. 지난 10여 년간 극심한 빈티지 변화를 매년 겪어 왔음에도, 수십 년간 선대가 남긴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금 세대의 생산자들은 더욱 안정적이고 좋은 품질의 바롤로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는 와인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축복일 것이다. 유진은 “바롤로라고 꼭 오랜 숙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른 빈티지의 와인도 충분히 열어주면 천천히 즐길 수 있다. 마일드한 빈티지 같은 경우는 언제든지 편하게 즐기면 된다. 이런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와인이 지난 몇 년간, 그리고 앞으로 시장에 나올 빈티지들에도 이어질 것이다.”

수입사 국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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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국순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