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취미는 장비 갖추기부터 시작된다. 가볍게 동네 한 바퀴를 달릴 때도 러닝화가 필요한 것처럼,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면 첫 번째로 준비해야 할 장비는 와인 글라스다. 초보자 딱지를 떼고 한 단계 더 깊이 파고들게 되면 언젠가 와인 글라스에 투자할 때가 온다. 어렵게 구한 보르도 그랑 크뤼 올빈을 볼품없이 작은 글라스가 아닌 갓난아이 머리통만 한 넓은 볼을 가진, 날렵한 글라스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와인세계에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글라스 메이커, 리델(Riedel). 최초로 포도 품종에 맞춘 와인 글라스를 만들어 고급 와인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였고 와인을 경험하는 방식에 높은 기능성과 심미성을 더했던 주인공이다.
나는 수년 전 리델이 주최한 '글라스 익스피리언스' 프로그램에서 글라스의 차이를 경험한 뒤, 글라스를 고를 때 꽤 까다로워졌다. 이제 와인 글라스의 패러다임을 바꾼 리델의 여정을 되짚어가며, 와인과 글라스의 헤어질 수 없는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유럽 근현대사의 흐름과 맞물린 리델
모짜르트가 태어난 1756년, 보헤미아에서 요한 레오폴드 리델(Johann Leopold Riedel, 3세대)은 유리공장을 매입해 리델 크리스탈을 설립했다. 17세기부터 유럽 각지에 보헤미아 유리제품을 소개했던 리델 가문은 사업분야를 유리 제조로 전환하여 와인 글라스 왕조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장인이 직접 불어서 만든 유리잔(Handblown Glass)을 생산하며 럭셔리 제품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암울한 전쟁의 기운이 유럽에 휘몰아칠 때, 엔지니어였던 발터 리델(Walter Riedel, 8세대)은 광학기기와 조명의 필수품인 렌즈와 프리즘용 유리를 생산하며 산업용 유리 제조에도 집중했다. 뛰어난 기술력 때문에 독일군이 체코를 점령한 후 레이더 스크린 제작을 의뢰받았다. 체코를 침공한 소련은 그를 ‘중요한 전쟁 과학자’라며 소련으로 끌고 가 10년 동안 억류했는데, 그중 5년은 강제수용소에서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의 아들, 클라우스 리델(Claus Riedel, 9세대)은 독일군에 징집되어 이탈리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10개월 후 독일로 송환되던 중 영화 주인공처럼 탈출에 성공해 오스트리아로 갔고, 증조부 요제프를 위해 일했던 다니엘 스와로브스키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1956년 클라우스 리델은 소련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쿠프슈타인에 있는 유리공장을 인수해 리델 글라스의 오스트리아 시대를 열었다.
글라스웨어의 혁명, 소믈리에 글라스
젊은 클라우스 리델은 산업용 유리 대신 와인 글라스 생산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당시 널리 사용되던 글라스는 크기가 작았고 색깔을 넣거나 유리 표면에 무늬를 새긴 컷 글라스(바카라 스타일이 대표) 형태가 많았다. 그는 미적 디자인에 치중한 전통 스타일의 글라스가 와인을 즐기고 감상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주인공은 와인이지, 글라스가 아니란 말씀.
그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글라스를 실험해 본 끝에, 글라스의 디자인에 따라 와인의 향과 맛이 달라질 수 있고 더 좋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리고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의 단순하고 기능을 중시한 디자인 개념을 최초로 와인 글라스에 적용했다.
1958년 리델은 소믈리에 버건디 그랑 크뤼 글라스를 만들었다. 단순하지만 우아한 라인, 장식 없이 매끄러운 표면 모두 클라우스 리델의 의도 그대로였다. 37온스(1.094리터)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금붕어 보울"이라고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했다.
세련되고 실용적인 이 글라스는 현대 와인 글라스의 원형이 되었다. 현재 ‘20세기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이 글라스는 10년이 지나 1973년 소믈리에 컬렉션으로 재탄생했다. 초기 시장 반응은 냉담했지만, 와인 평론가와 애호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와인의 메시지가 인간의 감각으로 완전히 흡수되도록
뒤를 이은 게오르그 리델(Georg Riedel, 10세대)는 와인세계와 강력한 유대관계를 구축하면서 ‘와인 글라스=리델’이란 공식을 만들었다. 유명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은 그를 “훌륭한 와인 시음가이며 진지한 와인 수집가”라고 할 정도로 와인에 진지했다. 한 인터뷰에서 게오르그는 “와인이 가진 위대함, 복합성과 진지한 아름다움을 최대한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최고의 글라스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을 드러냈다.
기존 디자인 개념을 다듬어 1986년 최초의 머신메이드 글라스, 비늄(Vinum)을 출시했다. 럭셔리한 소믈리에 컬렉션의 저렴한 대안으로 시작한 리델의 대표 글라스로 자리 잡으며 시장 확대 효과까지 거뒀다. 세계 각지의 와인 생산자와 함께 진판델, 시라, 리슬링 등 거의 모든 와인을 위한 새로운 글라스를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스피릿, 맥주, 사케 등 와인 외 주류를 위한 글라스도 만들어 명실공히 글라스 왕국의 입지를 굳혔다.
‘글라스 익스피리언스’ 프로그램은 그가 타고난 마케팅 귀재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와인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와인에 맞는 최적의 글라스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성’을 홍보, 교육했다. 지금에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허무맹랑하게 들릴 뿐이었다. 1989년 로버트 몬다비(Robert Mndavi)와 그의 두 아들이 와이너리에서 사용하는 글라스와 리델 글라스의 차이를 경험한 뒤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몬다비는 즉시 와이너리에서 사용하는 모든 글라스를 리델로 교체했다. 이렇게 와인메이커들은 리델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었다. 게오르그 리델의 오랜 친구이자 이탈리아에서 리델 글라스를 유통했던 피에몬테의 전설 안젤로 가야(Angelo Gaja)는 “리델 글라스는 와인이 자신의 특성을 완전히 표현하고, 온전한 품격을 갖추도록 도와준다”라고 극찬했다. 보르도의 크리스티앙 무엑스(Cristian Moueix)는 “리델 글라스는 모든 와인이 빛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2013년부터 11대 막시밀리언 리델(Maximilian J. Riedel, 아래 사진)이 리델의 황금기를 이어가고 있다. 스템이 없는 'O' 시리즈는 막시밀리언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과도한 디자인(다리를 없애다니…)이 아닌가 싶었지만, 캠핑이나 소풍, 혼술할 때 등 쓰임새가 확실히 자리 잡았다. 그는 탄탄한 사업 지식과 시장 이해, 디자인 안목을 갖추고 있으며 SNS의 영향력을 잘 아는(보기 드문) CEO다. 전 세계 최대 규모의 글라스 익스피리언스를 진행하며 글라스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현재 55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로도 활동하고 있다(흥미로운 내용이 많으니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우리의 올바른 선택은
올해 리델은 창립 268주년을 맞았다.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수출하여 연간 약 6천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자랑한다. 리델의 주요 글라스 시리즈는 다음과 같다:
- 현대 와인 글라스의 모델, 소믈리에(1973)
- 리델의 베스트셀러 비넘(1986)
- 스템리스 'O' 와인 텀블러(2004)
- 소믈리에 글라스의 재해석, 블랙타이(2008)
- 뉴 시그니처 레드타이(2015)
- 컬러풀한 핸드메이드 파토마노(2017)
- 혁신 기술 '옵틱 임팩트'를 적용한 퍼포먼스(2018)
- 리델 최초의 평평한 바닥 디자인 와인윙스(2020)
- 엣지 있는 다이아몬드 스타일 벨로체(2022)
- 프리미엄 머신메이드 슈퍼 리제로(2023)
매의 눈으로 꼼꼼하게 따져본다 해도 수많은 리델 글라스 중 가장 딱 맞는 글라스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우유부단한 자신을 탓하지 말고, 20년 넘게 리델 글라스를 수입해 온 대유라이프 허다영 브랜드 매니저의 추천을 참고해보자. 모두 다용도로 쓰기 좋다.
와인 1일차라면, 리델 벨로체 카베르네 소비뇽(Riedel Veloce Cabernet Sauvignon)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인을 시작할 때 카베르네 소비뇽을 선택하는 경향을 고려해 이 잔을 추천했다. 기계로 제작되었지만 손으로 만든 듯 섬세하고, 스템의 두께도 얇아 가볍다. 추천 이유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볼(bowl)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급격한 각도 변화로 인해 스월(swirl)할 때 충분한 공간을 제공해 와인의 아로마를 풍부하게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와인에 빠진 지 N년차라면, 리델 레드타이 버건디(Riedel Red Tie Burgundy)
와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섬세한 와인을 찾게 되고, 이 시기쯤이면 고급 글라스에 투자할 의향도 생기기 마련이다. 리델의 마더 글라스, 레드타이 버건디는 이러한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올드 빈티지 피노 누아 품종에 맞춰 설계된 이 글라스는 넓은 튤립 모양과 살짝 벌어진 림이 특징으로, 섬세한 품종의 와인이 가진 향과 맛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우아한 볼 라인과 레드 스템이 아름다워 시각적으로 특화된 걸작이다.”
미국의 비즈니스, 금융 전문 뉴스 웹사이트,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 리뷰에서 ‘와인 전문가가 선정한 최고의 와인잔’으로 뽑힌 샴페인 리델 글라스를 소개한다.
샴페인 홀릭을 위한 리델 파토 아 마노 샴페인(Riedel Fatto A Mano)
가느다란 플루트형보다 넓은 디자인으로 스파클링 와인의 아로마를 풍부하게 발현시키고, 거품을 어느 정도 유지해준다. “샴페인 전용이라기보다 화이트 와인 글라스에 가까운 디자인으로, 세련되고 가볍다.” 예쁜 컬러 스템이 매력 포인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델
2004년, 리델은 독일 최대 유리 생산업체인 나흐트만(Nachtmann)과 자회사 슈피겔라우(Spiegelau)를 인수했다. 리델은 이를 통해 기술을 강화하여 고급 와인 글라스와 고기능성 유리 제품 라인을 확장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그러나 꽃길만 걸을 수 없는 법, 리델 역시 여러 도전과 비판에 직면해 왔다.
일부 비평가들은 비교 시음회에서 특정 글라스가 와인의 맛과 향에 차이를 준다고 느끼게끔 암시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지나친 억측으로 볼 수 있다. 좋은 글라스가 주는 차이는 분명 존재하며, 이미 논쟁의 마침표가 찍힌 지도 오래다. 잘토(Zalto), 쇼트츠비젤(Schott Zwiesel), 소피앤왈드(Sophienwald) 등 여러 경쟁사도 고급 와인 글라스를 선보이며 일부 소믈리에와 와인 애호가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델은 전문화를 강화하고 커뮤니케이션과 교육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지인들의 의견을 모아보니, 대부분이 유려한 디자인을 꼽았다. 리델의 디자인 철학이 제대로 구현되었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좋은 내구성과 편리한 관리성을 칭찬한 지인은 설거지할 때 잔을 다루는 데 무섭지 않다고 덧붙였다. 가볍고 입술에 닿는 림이 얇은 게 마음에 든다는 의견과 전통의 품격, 브랜드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꼽기도 했다.
“리델은 기술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벼운 무게는 와인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게 하고, 종이처럼 얇은 볼은 와인의 향과 맛을 더욱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미적인 면도 뛰어난데 특히 핸드메이드 글라스(레드, 블랙, 파토 아 마노)의 컬러 스템은 다른 브랜드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색상으로 오브제의 역할까지 한다.” 허다영 브랜드 매니저가 찍어준 장점과 지인들이 꼽은 장점이 일맥상통한다.
리델은 와인 글라스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꾸었고, 와인을 감상하는 방식까지 바꿨다. 명불허전이 따로 없다. 마지막은 타임 매거진의 리델 기사 일부로 마무리한다.
“리델 가문은 단 한 병의 와인에도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적 없다.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이 오스트리아의 유리공예 장인 가문은 거의 모든 와인 명가들보다 와인 애호가의 즐거움을 더 높이기 위해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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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까브드뱅